About
CV
Artist Statement
Critic
Collaboration

Main Artworks

2025
2024
2023

2022

2021

2020

2019
- 2018


Special Artworks

사회적풍경
동자석

4·3



︎
 

Copyrightⓒ 2025. KimSan.
All rights reserved.
About
CV
Artist Statement
Critic
Collaboration

Main Artworks
2025
2024
2023
2022
2021
2020
2019
- 2018

Special Artworks

사회적풍경
동자석

4·3

︎

Copyrightⓒ 2025. KimSan. All rights reserved.










2024


현실의 숲에서 만난 하얀 사슴, 백록(白鹿)


정병헌(성신여대 미술대학장)


김산 작가의 세계관과 작품 철학은 그의 삶과 환경에서 비롯된 깊은 뿌리를 담고 있다. 제주라는 자연과 문화가 어우러진 독특한 공간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작가는, 자신의 삶의 본향인 제주를 기반으로 한 예술적 상상력을 작품에 녹여낸다.

백록(白鹿)은 김산 작가의 상징적 이미지로, 제주 자연과 신비로운 상상 세계가 결합 된 이상향의 메타포로 보인다. 이 상징은 단순히 자연을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인간의 근본적인 존재 의문과 본질적인 염원을 탐구하는 매개체로 작용한다. 백록이 사는 신비로운 세상, 즉 본향(本鄕)은 작가의 내면과 외부 세계가 조화를 이루는 이상적인 공간으로 상상된다.

김산의 작품 세계는 현실과 초현실, 낭만적 상상력이 결합 된 독특한 시각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의 묘사는 사실적이면서도 초현실적 요소를 통해 현실과 이상 사이의 경계를 넘나들며, 관객에게 인간 존재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제주라는 공간은 단순한 지리적 배경을 넘어 작가의 정체성과 예술적 영감의 원천으로, 작품 속 모든 요소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림을 그리는 행위가 육체적, 정신적 노동의 산물인 동시에 창조의 즐거움을 동반한다는 작가의 철학은, 그의 작품에 담긴 열정과 진정성을 잘 나타낸다.

김산 작가는 불확실성과 모호함 속에서도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즐거움을 통해 예술적 본질을 탐구하며, 본향이라는 이상향을 작품으로 구현해내고 있다. 작가의 삶과 작품 세계는 생명, 자연, 인간의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로 연결된다. 특히 30대의 나이에 급성 심근경색을 겪으며 생사와의 경계를 마주한 경험은 그의 예술적 표현에 큰 전환점을 제공하였다. 이러한 경험은 작품 속에서 백록(白鹿)이라는 중요한 모티브로 구현되었으며, 이는 단순히 아름다운 자연의 상징을 넘어 생명 연장과 영속성에 대한 작가의 염원을 담고 있다.

고서에 나오는 "사슴이 1100년을 살면 흰빛이 된다." 는 이야기는 그에게 특별한 영감을 주었고, 이 전설적인 흰 사슴은 그의 작품에서 영적 상징과 더불어 삶의 근원을 탐구하는 매개체로 자리 잡고 있다. 한라산의 백록담과 숲은 그의 유년 시절의 이상향이자 내적 평화의 상징으로, 작품의 배경이자 주제의 중심을 이룬다. 이러한 자연적 요소는 작가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그의 스토리텔링을 풍부하게 만드는 중요한 근원이 된다.

사회적 풍경(Social Landscape)이라는 개념은 작가가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탐구하고 조명하는 방식에서 비롯된다. 자연 속에서 인간의 흔적과 시간의 흐름을 담아내는 이러한 풍경들은 그의 개인적 경험과 가족들의 삶에서 비롯된 간접적인 이야기를 아우른다. 이는 단순한 자연의 묘사를 넘어 인간과 자연의 공존과 충돌, 그리고 그 안에서 피어나는 생명의 순환을 드러낸다. 숲은 특히 중요한 상징으로서 작가의 내면과 예술 세계를 반영한다. 숲은 생명의 순환과 자정작용을 상징하며, 씨앗의 발아부터 열매 맺음, 그리고 계절의 변화 까지를 포함한 자연의 끊임없는 흐름을 표현한다. 이를 통해 작가는 인간과 자연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고, 그 균형이 깨질 때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시사하고 있다.

김산 작가의 작업은 자연을 단순히 미적 대상으로 삼는 것을 넘어, 자연을 통해 삶의 근본적인 물음과 인간의 책임을 묻는다. 그의 백록과 숲은 단순한 그림의 소재가 아니라, 인간의 존재 이유와 자연과의 관계를 심도 있게 탐구하는 도구이자 상징이다.

김산 작가의 숲과 백록(白鹿)은 그의 예술 세계를 관통하는 상징적 연결고리이자, 철학적 메시지를 담은 매개체이며, 숲은 단순한 자연 풍경이 아니라, 작가가 체험했던 삶의 일상과 창의적인 드로잉이 결합하여 만들어낸 초현실적인 공간으로, 현실과 이상향의 경계를 넘나드는 장소로 묘사된다. 이를 통해 작가는 자연의 아름다움이 인간의 이기로 인해 쉽게 파괴될 수 있음을 경고하며, 우리에게 자성을 촉구하고 있다.

숲은 현실의 세계와 이데아의 세계(이상향)를 연결하는 통로로, 우리가 꿈꾸던 이상적 공간으로 이끈다. 이 숲을 통해 우리는 현실의 문명과 삶의 방식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하게 되며, 그 속에서 등장하는 백록은 단순히 그림 속 동물이 아니라, 우주의 기운을 내려받은 성스러운 존재로, 신비로운 세계로 이끄는 안내자이자 인간 삶의 근원을 되돌아보게 하는 상징으로 표현된다.

백록(白鹿)은 김산 작가의 작품에서 생명, 자연, 이상을 아우르는 염원의 상징이다. 그것은 단순한 장수나 신비로움의 상징을 넘어, 작가 자신과 인간 모두가 되찾고자 하는 본향(本鄕)을 향한 여정의 동반자이며, 백록은 작품 속에서 관객과 작가를 연결하는 매개체로, 오늘날의 복잡한 문명을 비추어 보는 거울임을 알 수 있다.

작품을 통해 김산 작가는 단순히 아름다움을 재현하는 것을 넘어, 인간과 자연, 그리고 본향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던지며, 그 속에서 삶의 진정한 가치를 탐구하고 있으며 삶의 여정을 기록한 일기를 쓰듯이 백록은 새로운 그림의 장을 열고, 관객을 더 깊은 성찰의 세계로 이끄는 안내자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2024


낙원의 재건

강지선(홍익대학교 연구교수)


최근 제주갤러리에서 열렸던 김산의 개인전 《염원》은 그의 작업의 여정을 파노라마처럼 보여준다. 지금까지 김산의 작업은 크게 두 가지 방향성을 보여주는데 하나는 ‘사회적 풍경’이고 또 다른 하나는 ‘본향(本鄕)’이다.

‘사회적 풍경’과 ‘본향’에서 김산은 개인과 공동체의 역사가 서로 스며들고 겹치는 이야기들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풀어내는 작가의 태도와 관점은 다르게 느껴진다. ‘사회적 풍경’은 제주 사람들의 삶의 자취와 사라져가는 것들을 담백하게 기록하려는 리얼리즘의 태도가 엿보인다. 반면에 ‘본향’은 나의 기원과 자연에 깃든 영성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낭만주의의 상상력과 감수성이 묻어난다. 곶(숲)의 영험함과 우주적 신비, 보이지 않는 세계를 둘러싼 관심은 상징주의의 색을 비추기도 한다. 같은 곶자왈을 그리더라도 ‘사회적 풍경’과 ‘본향’의 숲은 다르다. 전자의 숲이 풍파와 인고의 숲이라면 후자는 안식과 치유의 숲에 가깝다.

나는 이 글에서 김산의 삶과 함께 작업이 변화된 계기를 살펴보고, 두 작업을 연결하는 동시에 지금 그가 서 있는 예술의 자리에 관해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글의 상당 부분은 올해(2024년) 3~4월 개인전 당시 제주갤러리에서 김산과 나누었던 대화에 기반하고 있다.

잘 알려졌듯 김산은 제주 문화 연구자이자 미술 평론가인 김유정 선생님의 아들이다. 그는 아버지를 따라 절, 당집, 무덤, 숲과 오름을 누비며 성장하였다. 신화, 전설, 무속이 밴 삶과 죽음의 장소는 그에게는 놀이의 장소이기도 하였다. 그래서인가 무덤을 지키는 동자석을 그린 <삶의 노래> 속 동자의 천진난만한 표정은 무덤가에서 뛰어놀던 어린 시절 김산의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밭담과 산담의 돌, 해변의 검은 모래, 들판과 숲의 억센 풀, 제주의 거친 바람과 파도에 깎이고 다듬어진 모든 것들이 놀이의 재료가 되었을 것이다.

제주 민중문화 전문가인 아버지의 주변에는 늘 제주의 민중미술가들이 있었다. 김산은 그들로부터 4.3과 질곡의 역사, 예술을 배우며 커갔다. 또한, 역사와 시대의 목격자로서 예술가의 소명을 배우기도 하였다. 그렇게 아버지의 곁에서 가깝게 접한 예술은 그의 업이 되었다. 그리고 대학생 때 해녀였던 할머니의 삶을 그리며, 제주의 생활사는 작업의 주요한 의제가 되었다. 이후 대학 졸업 때쯤 마을 어귀의 폭낭(팽나무)을 검은 볼펜과 아크릴로 그린 흑백조의 작업을 바탕으로 ‘사회적 풍경’ 시리즈가 시작된다. ‘사회적 풍경’은 폭낭, 산담, 곶자왈, 동굴, 동자석, 잠녀(해녀) 등 자연에 개입된 인간의 문명과 역사에 관한 미적 기록이다.

2019년, 31세가 되던 해에 김산은 일생일대의 사건을 경험한다. 예기치 않게 급성 심근경색이 찾아왔고, 죽음의 위기를 마주하며 그는 삶과 작업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병상에 누워 있는 시간은 가장 소중했던 순간으로서 어린 시절을 회상하고 삶과 죽음, 신의 존재를 사유하게 하였다. 그렇게 삶의 전환점에서 탄생한 주제가 ‘본향’이다. 김산은 ‘본향’을 통해 제주 문화의 원형을 탐구해가면서 나의 내면세계-나의 꿈과 소망, 감정, 목소리를 작업에 녹여내고 싶었다. 따라서 ‘본향’은 나의 원형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지만, 나의 예술에 관한 물음이자 염원의 표상이라 할 수 있다.

‘본향(本鄕)’은 본래의 고향 혹은 태초의 집이라는 뜻이다. 제주에서 본향은 마을과 주민의 길흉화복을 관장하는 신을 일컬으며, 그 신을 모신 신당을 본향당(本鄕堂)이라 한다.1) 본향의 이미지는 곶자왈로부터 나왔다. 곶자왈은 곶(숲, 산)과 자왈(가시덤불)의 합성어로 용암이 만들어낸 암석이 나무와 덩굴 등 다양한 식물수종과 더불어 숲을 이룬 제주의 특수한 생태 환경이다. 또한, 곶자왈은 수렵, 목축, 농사, 숯과 옹기의 생산, 4.3의 피난처 등 제주 사람들의 오랜 삶의 터전이었다. 이곳에서 거목과 숲의 신들에게 마을의 안녕과 화합, 건강과 풍요를 기원하는 제의가 열리기도 하였다.2) 반면 김산은 숲의 역사를 드러내는 것에 초점을 두지 않는다. 그는 숲을 신화와 전설의 상상력과 기억으로 재구성한다. 숲은 실재하나 꿈의 장소이다.  

‘본향’에는 백록(白鹿)이 등장하는데, 한라산의 ‘백록담 전설’ 속 백록은 신선이 타는 신성한 동물로 장수를 상징한다.3) 백록은 죽을 고비를 넘기며, 삶의 의지로부터 나온 모티브이다. ‘본향’에서 백록은 작가 본인이자 제주 사람, 나아가 숲을 지키는 수호신을 나타낸다. 백록은 늘 홀로 있다. 그러나 백록이 외롭지 않은 것은 그를 포근하게 안아주고 보호해주는 요람 같은 숲이 있기 때문이다.

‘본향’은 자연과 인간, 신이 교감하며 하나 되었던 공동체의 이상세계에 대한 표현이다. 김산은 전설과 신화, 토템에 기대어 이성의 질서와 개발의 논리에 묻혔던 우주적 가치와 신비를 재건하려고 한다. 동시에 ‘본향’은 나의 낙원에 관한 그림이다. 그의 기억 속 숲은 어린 시절에 뛰어놀았던 ‘안뜰’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그에게 숲은 현실에 존재하는 유토피아인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이다. 숲은 “정원의 깊숙한 곳”, “다락방”, “다락방의 한가운데 세워진 인디언 텐트”가 된다.4) 놀이를 통해 나와 동물, 숲이 하나 되었던 비밀스럽고 신성한 장소, 그곳은 집을 떠난 존재들이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안식처이자 성소이다. ‘본향’은 나의 집, 나의 낙원, 나의 우주, 나의 예술의 재건에 대한 꿈을 담고 있다. 마치 그가 죽음의 문턱에서 삶을 재건하였듯 말이다. ‘본향’의 시간은 과거로 향하는 동시에 미래로 향한다. 김산의 앞으로의 행보가 기대되는 이유이다.


1) 한국민족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3769 참조.
2) 송시태, 김효철, 김대신, 좌승훈, 『제주 곶자왈과 문화』, 제주학연구센터, 2006,       
     http://archive.jst.re.kr/jejustudiesDetail.do?cid=040200&mid=RC00084132 참조.
3) 디지털제주문화대전, 「백록담 전설」, https://www.grandculture.net/jeju/toc/GC00700855 참조.
4) 미셸 푸코, 이상길 옮김, 『헤테로토피아』, 문학과지성사, 2023, p.13








2024


‘염원‘, 오래된 숲에서 사는 백록의 물음

김유정(미술평론가)


지나온 시간의 경로를 찾아서

최근 김산의 그림은 신비한 기운으로 싸여 있다. 고전적인 영성(靈性)의 느낌이랄까, 울창한 숲에서 나오는 청량(淸涼)한 화면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런 기운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림은 삶의 반영되기에 화가의 삶에 그 궁금증이 더해진다. 김산의 고향은 가파도와 마라도로 가는 뱃길의 작은 항구 도시 최남단 모슬포이다. 이 모슬포가 속한 대정읍은 과거 외세의 질곡(桎梏)의 역사가 스민 아픈 땅으로, 여전히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곳이다. 대정읍은 옛 대정현 지역으로 말만 들어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거의 알 정도로, 동계 정온과 추사 김정희 등 정치적인 이유로 많은 이들이 유배를 왔고, 1901년 신축민중항쟁의 장두 이재수의 고장이며, 황사영의 아내이자 천주교인 정 마리아의 슬픈 묘역이 있는 곳이다.

모슬포의 해안은 조선시대 왜구들의 침범이 잦았고, 그 앞을 흐르는 구로시오(黑潮) 해류는 동인도회사 하멜을 비롯하여, 중국, 필리핀, 베트남, 일본 오키나와, 규슈 지역의 어민들을 데리고 오고, 반대로 제주민을 그 곳으로 데려가 이어도의 희망을 품게 했다. 현대사에서는 일제강점기에 건설된 알뜨르 비행장이 있었고, 일본군이 패망하여 떠나자 미군이 다시 관여하면서, 한국전쟁 때 육군 제1훈련소가 만들어지고, 중국군 포로수용소 등 피난민을 포함한 군사기지촌이 되었다. 전후에는 미군부대 맥라브 기지를 만들어 휴양지라는 이름으로 운영했으며, 지금은 미군으로부터 한국 공군에게 이관된 모슬봉 레이더기지가 동북아시아를 감시하고 있다.

김산의 증조부는 4·3항쟁에 연루돼 6·25때 예비검속으로 구금된 후 섯알오름에서 희생돼 백조일손(百祖一孫)에 묻혔다. 당 조모(祖母)는 해녀(잠녀)로 일생을 보내며 본향당에서 바다의 공포를 이겨냈었다. 김산의 그림에는 그의 가계(家系)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김산의 작품은 마치 리트머스(litmus)紙 처럼 자신의 가족사와 제주사가 중첩되면서 4·3, 굿, 폭낭, 본향의 의미들을 해석한 것이다. 김산의 독특한 성장배경과 맞닿아 있다고나 할까. ‘사회적 풍경’이나 ‘백록’의 주제는 그 가족사의 확장이며, 사실적인 묘사 방식을 지향하는 것도 그런 역사 인식과 장소 경험을 반영한 것이고, 초현실적인 관점을 비치는 것도 낭만주의적인 이상향의 시각적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부모 세대의 역사와 시대정신을 MZ세대로 횡단하여 재해석 하고 있는 것이다.

김산은 대학생 신분으로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어릴 적에 시골 고향(모슬포)에서 해녀 할머니의 생활을 지켜보면서 자란 것을 계기로 김산은 2010년 대학 2년을 마치고, 할머니의 바다를 주제로 삼아 “어머니의 바다” 전을 이중섭 미술관 창작스튜디오에서 끝마치고 군 입대를 했다. 이때 해녀 할머니의 일생에 관심을 가지고, 해녀굿, 물질, 해녀들의 바다이야기를 그릴 수 있었다. 제대 후 대학을 졸업하면서 폭낭(팽나무)의 생명력에 매료돼 한동안 볼펜으로 흑백작업과 아크릴릭 칼라 작업을 했다. 그 후 곶(자왈)에 시선을 돌려 곶이 풍기는 원시적인 느낌을 받고 식물의 관찰을 통해서 자연생태에도 마치 인간처럼 삶과 죽음이 엄연하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한 시골 고향이 전해주는 본향(本鄕:마을수호신)의 의미가 매우 강렬해서 이후 폭낭, 사회적 풍경, 백록, 곶(자왈)의 주제에 상징성을 되살릴 수 있었다. 사회적 풍경에는 다시 산담과 4·3의 동굴, 할머니의 초상, 숲이 등장했고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버스정류장, 동자석 같이 기억이 상실된 일상의 풍경에도 눈을 돌려, 2021년 국립현대미술관 “젊은 모색 21”에 선정 작가가 돼 부스 개인전을 열 수 있었다.

 
작품은 경험에서 얻은 삶의 형태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한 사람의 눈으로 바라보는 대상인데도 어떤 때는 크게, 어떤 때는 작게 보인다.”고 했다. 이때 대상은 사물이거나 풍경, 아니면 물체일 것이며, 다르게 보인다는 것은 스스로 삶의 경험에 대한 느낌, 보는 방법에 따라 그렇게 보이게 된다. 또 대상은 색채의 시각적인 변화에 의해서 물체의 확장과 축소, 공간 거리에 따라 대기 원근의 음영적 빛의 작용에도 영향이 미친다.

결국 다빈치는 “경험은 절대 틀리지 않는다.”는 확신 속에서 무엇보다도 먼저 경험을 중시 여겼다. 그는 “감각을 통과하지 않는 정신적 행위는 모두 공허하다.”라고 할 정도로 감각적 경험을 최선으로 여겼다. 경험은 시간을 전제로 하여 자신의 삶을 깊이 있고, 익숙하게 만든다. 곧 인생이 경험 자체인 것이다. 생명체인 인간은 모든 삶의 정보가 이 경험에서 나오므로, 누구나 공간에 대한 지각 경험은 다르겠지만 어느 누구도 그 경험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화가의 경험은 자신의 사회적 환경에 따라 인상적으로 강렬하게 남은 것들이 작품의 주제 담론이 되는 것이다.

하나의 인상(印象)은 지각되는 순간 경험으로 남고, 그 인상에 대한 느낌들이 몸의 기억인 관념이 된다. 우리는 온갖 시각적 관념 속에서 살아가며 응고된 이념의 그물에 둘러져 있어 볼 것을 제대로 볼 수 없다. 이념으로 둘러싸인 마음은 흔들리기도 하지만 견고하게 고착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상상적 관념은 실재의 환영(幻影)처럼 꿈과 같이 사실주의로 허구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이것은 회화가 단지 현실의 재현적인 모방이 아닌, 사실적이지만 비현실적인 상징, 즉 가상현실의 그림을 그릴 수도 있다.

시각은 지각으로써 마음을 움직인다. 오래전 내면에 쌓인 무의식에서, 외부적 사건, 상황에 따라 동요하는 현실의 감정까지 오감 지각은 항상 유동(流動)하는 감정을 일으킨다. 예술은 바로 이 몸의 경험적 느낌의 결과이다.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 1907~2003)는 “작품은 하나의 경험”이며, 사실상 “예술은 작품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닌 그런 정신”이라고 하여, 오로지 작품 속에 화가의 정신세계가 있으며, “예술의 목표 자체가 예술”이라고 말한다. 폴 발레리(Paul Valéry, 1875~1945)는 “화가는 평생을 다하여 회화를 찾는다. 그때 평생(삶 전체)은 그 목표도 수단도 확실치 않은 창작에 대한 탐구”를 하게 되는데, 그 창작은 “불확실성과 절대적 열정만이 있는 탐구”라고 말하고 있어 기약 없는 예술의 길을 말하고 있다.

사실, 그림을 그리거나 그림을 감상하는 것도 놀이 문화에서 유래한다. 요한 하위징아(Huizinga, Johan, 1872~1945)의 말처럼 문명사회의 예술은 신화와 의례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예술도 놀이라는 원초적인 토양에서 자양분을 받고 있다. 현대인의 마음에 자리하는 신화적 상상력은 우리들의 오래된 원초성에 대한 그리움일 것이다. 신비, 성스러움, 고고함에 대한 그 과거의 우러름은 오늘날은 게시(揭示)의 가치가 되고 있다.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없는데 한 화가의 경험은 멀게는 이론적으로 얻어지고, 가깝게는 생활 속에서 획득된다.

우리는 마을길에서, 또는 숲길에서 수많은 사물들과 만난다. 부드러운 바람을 스쳐 가고 고개를 내민 나뭇가지를 건드리며 투박한 돌담을 돌아서 먼 산을 마주한다. 돌길, 습지, 밭담, 새, 구름, 나비, 나무, 넝쿨, 이웃의 풍경, 사람들을 바라본다. 경험하는 것, 즉 살아가는 것은 바라봄의 연속이며 스쳐감의 경로이기에 자신도 모르게 무심코 지나가는 것들도 있다. 이것을 우리는 인생이라고 말한다. 인생에선 매 순간 삶의 아름다움과 고통, 기쁨과 좌절이 기다리고 있으며, 충만함과 억울함, 또 보람과 희망, 분노와 평안이 교차하거나 뒤섞인다. 흔히 사물들 간 스치고, 지나가고, 만나는 것을 관계라고 하는데 어떤 관계는 신중하고 어떤 관계는 의미 없이 잊힌다. 어떤 관계에선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혹은 어떤 만남에서는 타자의 실체를 깨닫기도 한다. 언제나 삶은 자신을 속이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결국 인생은 자신의 문제들을 자신이 해결해야 하는 과정인 것이다.

사물 자체는 세계 전체이며 사물들은 고유한 속성이 있다. 이를테면 숲에서는 나무와 풀, 서식하는 동물이 중심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공간에서 중심이 된다는 것은 보는 자의 시선의 선택이다. 지정된 사물들에서 그것들의 세계를 알 수 있는 것처럼, 어떤 장소의 현장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거기의 사물들의 속성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장소에는 인간의 시선 방향에 따라 빛나는 존재들이 있다. 하나의 공간에서 빛나는 존재들은 무엇이나 될 수 있지만 그것의 선택은 오로지 화가의 영혼에서 할 일이다. 예술은 사물의 이미지를 강렬한 인상으로 부각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숲과 같이 현실에 존재하는 것일 수도, 오래된 시간 너머 백록같이 과거의 존재자를 불러올 수도 있다. 예술은 무엇이든 소환할 수 있으며 상상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예술은 작품으로부터 규정되어야만 한다. 작품을 보면 화가의 정신세계가 보이고 자신의 ‘존재 드러냄’이 보이고, 또 다른 무한한 ‘세계가 열려있음’이 보인다. 현실과 허구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며 고뇌하는 화가의 열정도 보인다. 그 열정의 결과들은 불확실성을 압축시킨 담론 주제의 빛남으로 모아진다.         


김산의 상징적인 담론들

‘폭낭’은 제주어로 팽나무를 말한다. 제주에서 폭낭은 깊은 의미가 있다. 폭낭은 오래된 마을일수록 수령(樹齡)과 형태가 을씨년스러울 만큼 기괴하지만, 그 나무의 역할도 중요하다. 특히 바닷가 마을일수록 그 형태가 상상을 초월하며 풍향수(風向樹)로써 한라산을 향해 빗자루처럼 누워있다. 폭낭의 역할 중 한 가지는 폭낭이 있는 곳이 마을의 중심지가 된다는 사실이다. 평소에는 더위를 쫓는 쉼터의 역할도 하고, 마을 소식도 서로 전하는 장소가 되기도 하지만 긴급할 때 마을 공회(公會)의 장소가 되기도 했다.

또한 폭낭은 대표적인 神木(신목)이 되기도 한다. 본향당 안에 오방색 물색(컬러)을 걸고 신체(神體)가 되는 것이다. 해안 마을은 신체가 석상이나 잡목이 되지만 중산간 마을에선 폭낭이 주요 신체가 되고 있다. 김산이 폭낭을 마을의 중요 사건을 지켜본 목격자, 시간의 증인이라고 하는 것은 그 나무가 인간보다 훨씬 오래도록 역사 앞에 의연하게 서 있었기 때문이다.

‘사회적 풍경’이라는 담론은 풍경 속에 은닉(隱匿)된 사람들의 삶의 흔적을 찾는 것이었다. 멀리서 자연 그대로 보이는 풍경도 가까이에서 보면 수많은 사람들의 흔적으로 생채기를 입고 있다. 전쟁, 벌채, 산불, 채집, 사냥, 산행 등 생존과 관련된 직·간접적인 이유들의 흔적이 가득한데 토기 파편, 안경, 소뼈, 농기구, 비닐까지 인간 삶의 파편들은 아름다운 숲에 몰래 숨어 있다. 자연이 어떻게 서서히 사회화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때로는 풍경의 일부처럼, 때로는 너무 어색하게 말이다. 몰래 숨긴 것의 보물찾기처럼 숲의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는다면 결코 보이는 것은 없다.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은 자아의 통찰에 달려 있다.       

‘동자석’은 영혼에 대한 사유(思惟)에서 시작되었다. 어릴 때 산(山;무덤)에서 자주 보았던 동자석이 어른이 돼 새롭게 소환된 것이다. 동자석은 귀여운 아이 석상으로 먼저 떠난 이들을 위해 자손들이 효성으로 세운 현무암 조각이다. 석상 아이는 외로운 조상과 벗이 되어 온갖 심부름을 한다. 동자석은 떠난 조상을 위해 자손들이 예의, 효도, 그리움, 봉양의 의미를 담고 있는데 유독 제주도에 많이 만들어졌다. 여린 나비는 투박한 동자석과 대조를 이룬다. 아이 석상이 자손들 마음의 상징이라면, 나비는 조상의 영혼이 환생한 것으로 생각되는 자연적 실체이다. 굿에서 ‘나부(나비)’는 조상의 영혼으로 관념돼 한지 조각으로 날려 보낸다. 동자석과 나비는 서로 과거와 현재를 이으며, 인간의 육신과 영혼의 상보성(相補性), 조상과 후손이 교감하는 시간, 돌의 강함과 유기체의 유연함을 서로 대응시키고 있는 관계다. 무기물과 유기물도 모두 자연에서 나서, 결국 현실에서 만나고 다시 원래의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작가의 영원회귀사상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백록(白鹿)’은 한라산 신선 사상에 입각한 표현이므로 제주에서 장수와 평화를 상징하는 담론이 된다.


백록, 숲의 빛나는 만남     

김산은 요즘 신비한 숲을 그리고 있다. 한 마리의 백록은 지금 한라산에 없지만, 작가의 마음에는 늘 살고 있다. 백록의 숲은 과거 제주 원시림을 상징하기도 하고, 한라산 자락에 있는 ‘곶’의 모습이기도 하다. 원형(archetype)의 숲 사이 한 마리 흰 사슴은 제주의 상징으로 빛을 발한다. 고려시대 제주에는 노장사상, 무속과 불교가 유행하였는데 ‘당(堂:본 향당)오백 절(寺)오백’이라고 하여 제주섬 곳곳에 신당과 절간이 매우 많았었다. 예전 한라산은 사슴, 노루들의 놀이동산과 같았으나 조선시대에 해마다 다량의 사슴, 노루 가죽을 진상하다 보니 19세기 말에 이르러 한라산 사슴이 멸종하였다. 흰 사슴은 조선 초기부터 한라산에서 포획하여 조정에 바친 기록이 있고, 전설에 사슴 무리를 돌보는 신선 이야기가 전해온다.

구전에 의하면, 한라산은 홍산(紅山), 청산(靑山), 백산(白山) 세 가지로 불렀다. 봄에는 붉은 진달래, 참꽃이 가득하고 가을에는 단풍이 빨갛게 물들어 홍산이라 하고, 여름엔 수목이 푸르러서 청산(靑山)이 되며, 겨울에는 흰 눈이 덮여 백산(白山)이라고 했다. 계절 따라 변화무쌍한 한라산에서는 남극노인성을 볼 수 있으며, 신선이 날마다 백록(白鹿)을 데리고 와 물을 먹이는 곳이라서 백록담이라고 불렀다. 한라산은 예로부터 이처럼 노인성, 신선, 흰 사슴, 불로초, 영지버섯 등 도가의 장수 사상이 깃든 곳으로 유명했다.

한라산을 꼭짓점으로 보면 제주도는 남북의 길이가 짧고 동서의 길이가 긴 타원형의 섬이다. 180만 년 전 화산으로 만들어진 섬이기에 가는 곳마다 검은색 현무암이 지천으로 널려있다. 그 산허리 아래로 에워싸고 있는 ‘곶’이라고 부르는 숲이 여러 군데 있는데 오늘날은 곶자왈이라 부르고 있다. 곶은 우거진 숲을 말하며 한자로는 ‘수(藪)’로 쓴다. 지역민들은 오래전부터 ‘술’이라고 불렀다.

곶자왈은 근래에 만들어진 합성어로 곶=산 숲, 또는 깊숙한 산속의 수풀이고, 대규모로 숲을 형성하고 있다. 연관된 명사로 곶질(길). 곶밧(밭), 곶쉐(소), 곶돌(아아용암판석) 등의 말이 있다. 자왈=가시밭, 또는 작은 잡목이나 수풀이 우거진 가시덤불 지대로 작은 규모이고 곶가까이나 또는 밭 구석에 형성된다. 연관된 말로 가시자왈(가시가 많은 자왈)이라는 단어가 있다. 사실상 곶은 원시림 숲이 있는 장소이다. 제주는 바다로 둘러진 울울창창한 고도(孤島)였지만 몽골이 일본 정벌을 위해 한라산에서 벌목하여 수백 척의 전선(戰船)을 만들었거나 목장용 목책(木柵), 초가의 자재(資材), 진상선(進上船) 제작, 숯 재료 벌채, 화전(火田) 개간 등에 의해서 오늘의 숲의 모습이 되었다.

김산의 숲에 대한 모티프는 ‘곶(자왈)’에서 시작되었다. ‘곶’은 제주인의 생활근거지로 대개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사냥, 땔감과 열매의 채취, 목양(牧養), 숯가마 운영, 도피 은둔, 비념의 장소이기도 했다. 숲은 제주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핵심 장소가 된다. 숲으로 보여도 숲 이상의 사회적 장소였던 것이다. 김산의 백록은 한라산의 자연과 제주인의 삶의 소망으로써 장수사상을 근원에 두고 있다. 숲은 신성한 곳으로써 백록의 길이자 우주(하늘)의 기운이 내리는 영역이다. 이때 백록은 작가의 염원의 상징으로써 세계, 인간, 생태, 사물 모두를 아우르는 수평적 관계의 길로 안내하는 매개자가 된다. 특히 사실적인 묘사와 대기 원근법의 표현은 세속에서 벗어난 성스러운 신비주의를 더하고 있어서 마치 오늘날의 문명을 역설적으로 되돌아보게 한다. 자연스럽게 현재의 우리 세계를 비판적으로 보게 하는 것이다.

자연의 모든 것이 인간과 공생하는 관계라면, 여기에서 백록은 인간의 온갖 행위들을 응시하는 신성한 존재로서 현현(顯現)한 것이다. 인간다움의 마지막 모습이, 우리에게 여전히 양심이 남아있을 때까지라고 한다면 그래도 인류의 미래에 희망을 가져볼만하다. 김산의 염원은 인간다움을 잃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 숲의 생태적 ‘아름다움이 그대로 있음을’ 묻고, 백록이 빛나는 ‘순백(純白)으로 돌아올 날을 기다리는 것으로 답하고’ 있다. 모든 색의 마지막은 처음 바탕색(素色)일 것이라는 믿음에서 김산은 우리에게 묻고 있다.

“인간이여, 숲을 버리고 우리는 어디까지 추락할 것인가?”  











2022


관념적 서사와 환상의 조화가 자아낸 문화의 풍경

권주희(독립기획자/스튜디오126 대표)


우리는 환상이나 상상을 통해 실존하지 않는 것을 회상하거나 이미지화할 수 있다. 이것은 단순히 생각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부재하거나 현존할 수 없는 개념을 꿈꿀 수 있도록 표상하는 능력이다. 김산의 작품은 실재할 것 같은 제주의 풍경을 배경으로 삼는다. 하지만 이것은 자연을 화폭에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닌 작가의 기억과 상상이 가미된 재현적 풍경이다. 재현은 종종 유사성과 모방에 관한 문제로 이어지며 철학적인 표상주의와 연루되곤 한다. 다시 말해, 특정한 대상은 인지된 외부의 대상과 근본적으로 다른 심상이라는 것이며 인간은 최초의 감각 자체가 아닌 그것의 의미를 심상으로 기억한다는 뜻이다.

전통적으로 미술의 재현을 언급할 때 고려하는 세 가지 요소는 사물, 그것의 실제 이미지, 그리고 심상이다. 그중에서도 일반적으로 ‘이미지’라고 일컫는 ‘심상’은 정신적 산물로서 위상을 지닌다. 이미지란 어떤 사물과 사물의 실제 이미지 사이에 개입된 표상으로 인식되며 대상의 모사이거나 특정 의도가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래서 회화는 정신적인 의미와 동등하게 ‘환상적’, ‘관념적’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김산의 환상적 풍경은 제주에서 비롯된 정체성과 관련된다. ‘정체성’이라는 용어의 현대적인 용례는 구성원이 자신을 자신과 공유된 특성이나 조건, 또는 문화적 기원을 통해서 인식함을 의미한다. 제주도는 지정학적 위치나 지리적 환경뿐만이 아니라 시간의 축을 따라 형성된 역사적 서사 안에서 독특한 섬 문화를 형성해 왔다. 한반도에서도 특수한 지리적인 조건, 주변부로서의 존재, 역사적 사건들과 더불어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것은 설화를 비롯한 ‘이야기’였다. 본토와 다른 특수한 문화를 이루는 과정에서 도출된 이야기 속에는 그들의 사유와 생존 양식이 담겨 있다. 이러한 과정이 축적된 문학적 상상력은 사실을 함축한 중요한 의미이자 더 나은 세상을 주도하는 비판적 대응이기도 했다.

특히, 김산 작가는 제주를 기반으로 한 관념적 풍경에 설화를 녹여내어 지역문화를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작품명인 <본향(本鄕)>은 일반적으로 고향이나 태생지를 뜻한다. 즉,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이 가능한 장소다. 전기적인 관점에서는, 작가의 고향인 제주를 지칭하고, 거시적 의미로는 대자연을 뜻하기도 한다. 본향에는 직접 경험하지는 못했지만 전해져 오는 이야기들, 역사적 사실, 인간과 자연이 형성해 온 다양한 서사가 축적되어 있다. 4.3, 본향당(本鄕堂), 해녀 등 제주를 형성하는 문화적 요소들은 주로 생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 역사적인 사건에서 비롯된 이유를 알 수 없는 죽음, 그로 인한 소중한 이의 부재, 생계의 수단인 바닷일에 대한 우려 등이 반영되어 나타난다.

화면에 홀로 등장하는 백록(白鹿) 또한 작가 자신을 대변하기도 하고 대자연에 속한 인간을 상징하기도 한다. 소중한 존재가 무사하길 바라는 염원, 자신들의 터전인 제주, 더 나아가 자연을 수호하고자 하는 마음은 백록을 통해 함축적으로 드러난다. 백록은 제주 신화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영물로서, 장수를 기원하고 자연을 수호한다는 의미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김산은 회화를 통해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탐구한다.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여기면서도 자연을 재조형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로 인식하여 경계하기도 한다. 자신의 작품을 ‘사회적 풍경’ 혹은 ‘경험적 풍경’이라 일컫는 작가는 인간이 자연에 남기는 인위적인 흔적들을 묘사한다. 이를테면 곶자왈(곶+자왈)에 동물의 뼈, 돌담 아지트, 폭낭, 돌담, 밭, 마을, 들, 본향당, 정거장 등을 장치화하고 새, 사슴, 넝쿨, 숲과 관계를 맺도록 한다. 이 모든 요소가 화면 안에서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지만 실재하지는 않는 풍경으로 제시한다. 극명하게 대비되는 푸르른 숲과 백록, 드넓은 숲에 홀로 서 있는 생명은 비현실적이고 몽환적인 조화를 이룬다. 현재 우리를 둘러싼 자연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환상적인 풍경을 통해 자연을 하나의 독립적 객체로 바라보며 훼손되지 않고 보존되길 바라는 존중의 마음을 담는다.

상상과 현실이 빚어낸 문화적 풍경은 멈춰있는 것이 아니라 순환하고 변화하는 환경에 관한 이야기다. 자연 안에서 인간이 그려내는 흔적은 축적되고 또 다른 줄기로 이어지면서 다양한 관계를 형성한다. 정체성이라는 개념도 마찬가지로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라 무수한 요소가 결합된 변화 안에서 끊임없이 재맥락화, 재의미화되는 것과 같다. 문화란, 자연이 자아내는 풍경 위에 사람이 인위적으로 재구성하고 재편집하여 조화를 이루는 행위이다.

김산의 작품은 제주라는 지역, 그리고 그곳에서 형성된 문화가 명확한 지표로 역할하며 작가의 상상력, 기억력과 같은 탈감각적인 능력이 통합되어 가상의 공간을 형성한다. 이것은 인간이 본향에서 삶의 양식과 태도를 찾아가는 여정이며 관념적 서사와 환상의 조화가 이뤄낸 문화적 풍경이다.











2021


‘사회적 풍경’, 공감과 소통의 메신저

김명훈(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학예연구사)


미시적 시선이 애정에서 비롯되듯, 김 산은 정밀하고 섬세한 시각으로 제주도의 돌 하나, 풀 한 포기, 나뭇잎새 하나하나를 묘사한다. 절제된 색채와 성실한 묘사로 표현한 제주도의 자연은 평범하면서도 생경한 풍경으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러한 익숙함과 이질감의 교차지점에서 우리는 작가의 단순하면서도 진솔한 메시지를 읽을 수 있다.

작품에 등장하는 자연은 제주도의 순수하고 근원적인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작가가 보고 느끼며 몸담아온 제주도의 자연은 “나를 포함한 제주, 제주인의 모든 정체성과 정신세계를 함축하고 있는 곳으로서의 본향(本鄕)(『작가노트2019』)”이다. 즉 제주도의 자연은 물리적인 자연임과 동시에 개인적, 집단적 기억과 경험이 누적된 공간이다.  작가는 끊임없는 관찰과 연구로 공간에 내재한 무의식의 원형들을 선과 색채, 동식물 등의 다양한 소재를 통해 상징의 형태로 이끌어낸다. 이러한 예술적 발상의 과정에서 생성되는 결과물의 경우 객관적 보편성이 부족하면 공감도가 떨어지며 그 반대의 경우 독창성이 낮아지기 마련이다.

작가는 곶자왈, 돌담, 폭낭 등 제주도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들을 사생하고, 극사실적인 표현력을 바탕으로 공간을 재구성하여 독특한 화면을 창출한다. 이를 통해 예술적 발상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위의 두 가지 문제를 적절하게 해결한다. 그 결과 작가가 연출하는 풍경에는 다양한 해석의 층위가 존재하게 되며, 보다 확장된 내러티브를 함축한 새로운 구조가 만들어진다. 이러한 미학적 접근법은 천인합일의 일원론적 세계관에 기반한 동양철학에서 비롯한 것으로서 작가는 그 사고의 범위를 확장하여 예술의 사회적 기능에 대해서 고민한다. “나는 대상을 직접적으로 묘사하는 것을 넘어 개념적이거나 감각적 측면으로, 또는 심리적이면서, 혹은 사회적인 발언의 측면에서 작품을 창작한다.(『작가노트2021』)”

작가가 보여주는 제주도의 자연은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공간이자 독특한 지역성을 유지하고 있는 공간이다. 여기에 기저한 무의식의 원형들은 역사적으로 형성된 문화심리와 사회심리의 추동과 축적에 의한 결과물이다. 작가는 이를 능동적으로 체화한 후 선과 색채로 연역하며 문화적 색채를 보유한 독창적인 ‘사회적 풍경’으로 승화시킨다. 그 결과 ‘사회적 풍경’에 내재한 복합적인 표상들을 마주하는 감상자는 귀납적인 경험을 통해 작가의 사유 과정을 복원하며(혹은 감상자의 이해도에 따라 추체험하며) 보다 원론적인 차원에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게 된다.

“넘치는 문명에 도취된 우리들의 이야기를 화면에서 환기시키는 것은 오늘날 무관심증으로 병들어가는 마음을 치유하는 행위이기도 하다.(『작가노트2021』)” 궁극적으로 ‘사회적 풍경’은 본질적 가치를 담고 있는 자연이자 나와 사회, 과거와 현재를 종횡으로 이어주는 연결고리이다. 작가는 생의 의지를 구현하는 상징적인 공간을 논리적이고 유기적인 방식으로 구축함으로써 외부와의 공감과 소통을 효율적으로 이끌어내고 있는 것이다.  











2019


本鄕: 실향과 애도

문성준(작가)


인간은 원하건 원하지 않건, 자신의 시대 속에 있다. 이 말을 부정할 방법은 없다. 화가라면 누구나 시각체계(scopic regime)를 벗어나 보려 안간힘을 쓰지만, 심지어 그 안간힘마저도 시대적이다. 모네가, 세잔이, 그리고 호크니가 그랬던 것처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시각 예술가가 그랬다. 그린다는 행위는 본래 봄(seeing)에 근거한 것이고, 본다는 행위(seeing)는 물질적이고 제도적인 배치에 의해 사회 문화적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사회와 문화, 즉 시대라고 일컬을 수 있는 그 파도에 직면한 작가는 조약돌처럼 휩쓸릴 뿐이다. 그러므로 김산의 작품에 지금의 제주도가 묻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만, 우리가 흔히 보는 제주는 아니다. 그의 눈은 시대착오적인 시각으로 제주의 날것을 핥고, 그것을 가시덤불처럼 삭막하게 그린다. 예술가의 눈이 그렇다. 거리의 돌멩이를 보고도 기원전을 상기하고, 썩은 사과를 보고도 시각적 수사학을 떠올리듯 모든 면에서 비일상적(abnormal)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시대를 잃지 않는 것. 그것이 예술가라면 가지고 있어야 할 리얼리즘적 역량이다.

작가의 제주는 지금 TV 교양 예능 프로그램에 나오는 제주가 아니다. 밝고 고운 톤으로 새로운 유토피아를 말하는 TV 프로그램 속 제주는 이질적인 공간(heterotopia)이다. TV 디스플레이 속 몽타주는 이미지의 한 역할인 이마주(image)의 창조에 충실하였다. 원래 이마주라는 것이 실재와 관념의 단절을 야기하는 것은 아니므로 제주에 대한 이마주들도 어느 부분에서는 진실하겠지만, 어느 부분에서 그러하다는 말은 많은 부분에서는 그렇지 못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리고 헤테로(hetero-)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이형성(異形性)이 필요한 것처럼, 지금의 제주는 끊임없이 이마주를 생산해내고 있다. 마치 서사의 힘을 잃은 영화가 대사에 매달리는 것처럼, 지금의 제주는 섬 자체의 서사보다는 잠깐의 팝업(pop-up)이 대신하고 있다. 하지만 영화의 심오한 질문과 통찰은 서사 전체가 던지는 것이지 주인공의 한두 마디 대사가 던지는 것이 아니다. 제주는 그 힘을 잃어가고 있다.  

김산의 역할과 목적은 TV 프로그램과 다르다.
그의 작품에는 날것의 제주가 있다. 돌담 사이로 몰아치는 앙상한 바람과 그 바람에 시달려 억척스러워진 덩굴과 그 틈을 비집고 자라는 덤불 같은 제주가, 그의 그림에는 있다. 숲처럼 우거진 덤불이라는 의미의 곶자왈이라는 이름처럼, 아무런 낭만 없이 거칠고 담백하게 그려진 섬이 바로 그의 제주다.

하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그의 작품은 낭만적이기도 하다. 낭만을 덧대야 할 필요가 없을 만큼 제주는 이미 낭만적인 섬이라고 말하듯, 아무런 은유 없이 묘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낭만적 세계에서의 인간이 세계에 대한 대자적 입장을 포기하고 자연의 일부가 되기를 원하는 것처럼, 김산도 덤불 속으로 들어선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곶자왈을 조망하지 않는다. 작가의 시각은 덤불 숲 안에 머물며 종합으로서의 인간상을 포기한다. 그의 풍경은 언제나 근경(近景)이다.

하지만 가까움은 상처를 동반한다. 낭만이라는 개념을 뒤집어 보면 거기에는 슬픔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기 마련이다. TV 프로그램이 아무리 단편적 이마주들의 향연이지만, 그것도 동시에 실제이고, 그러므로 제주가 변하는 것도 현실이다. 김산의 작품은 그 현실에 대한 애도이다. 그의 전시는 본향(本鄕)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지만, 실향(失鄕)을 말하고 있다. 애당초 제주에서 작업하는 작가가 제주라는 본향을 그린다는 것은 이미 그것의 상실을 감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지척에서 목격하는 작가는 당연히 더 큰 슬픔을 느낄 수밖에 없다.

다행인 점은, 대상의 상실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을 대상과 동일시 하며 자기 파괴적인 무력감에 사로잡히는 우울과 달리, 애도는 대상의 상실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쏟았던 리비도를 회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울에는 기간이 없지만, 애도에는 기간이 있다.  

김산의 작업은 그가 고향을 애도하는 기간이다.
그 애도 기간 끝에 완전히 회수된 리비도가 어떤 모습으로 탄생할지 궁금하다. 그것은 실향을 받아들인 새로운 동시대 미술이 될 것이다.











2017


폭낭, 사회적 의미를 담은 유기체 생명의 구조물  

전은자(이중섭미술관 큐레이터)


김 산의 그림을 본 첫 느낌은 강렬함이다. 이것은 단지 흑백의 대비에서 오는 색채의 문제뿐만 아니라 작가의 삶에 연유한 어떤 특정한 감정의 발산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세상의 모든 것은 주체를 위해 존재하는데 사실상 주체의 의지는 스스로 자신을 결정하는 하나의 욕망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본 대상의 이미지는 자신의 의지가 탄생시킨 결과물이다. 그런 점에서 한 점의 그림 또한 작가가 발산하는 이성과 감성의 증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김 산의 그림에는 고독감이 배어 있다. 인간은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수많은 관계 속으로 내던져진다. 인간의 관계는 이익과 욕망을 위해서 타협하거나 화해하는 가운데 형성되고 같이 살아가기 위해서 협력하게 된다. 사회적 삶이란 다수의 인간들이 벌이는 생존경쟁 속에 놓이는 삶이다. 따라서 인간인 한 어떤 장소, 어떤 경우든 간에 관계 속에서 소외가 발생한다. 소외감의 원인과 정도가 다를 뿐 소외감이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김 산은 비바람에도 홀로 꿋꿋하게 서있는 폭낭(팽나무)에 자신의 예술의지를 투사하고 있다. 그는 제주도의 폭낭에게 누구보다도 가까이 다가서고 있다. 그것은 폭낭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언술(言術) 행위, 즉 침묵의 커뮤니케이션과 다름이 없다. 김 산에게 폭낭은 그 장소의 역사, 공동체의 삶을 지켜본 할아버지의 눈으로 시간의 흐름을 기록한 침묵의 메모리와도 같은 것이다.

나는 김 산의 ‘침묵’과 ‘응시’에 주목한다. ‘침묵(沈黙)’이란 말없는 것, 또는 말하지 않는 것이다. ‘응시’란 단순히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을 집중하여 똑바로 쳐다보는 것이다. 여기에서 폭낭은 의인화된 김 산 자신이 된다. 그는 무엇을 말없이 집중적으로 쳐다보는가. 변화에 대한 안타까움과 고독감이 배어나는 그의 폭낭 그림들은 역사주의와 환경주의에 맥락이 닿아 있다.

그는 또한 예술 활동을 사회적 책무로 여기고 있다. 예술의 사회적 책무란 공동체의 건강을 위해 노력하는 것, 공공의 가치를 미적으로 실현하는 것이다. 공동체를 위해 예술로써 사회적 발언, 고발, 저항, 기록을 하는 것이다. 김 산의 이런 생각은 바로 인류의 리얼리즘 전통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김 산의 작품이 크게 리얼리즘 전통에 서 있게 된 것은 그의 어린 시절의 성장과정과 무관하지 않다.

한창 암울했던 시절인 19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반에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겪은 어린 김 산의 시대 경험은 흑백 목판화 느낌, 토착적인 아이덴티티, 역동적 현장감, 사회적 참여 등이었다. 이런 경험은 그의 미의식과 정서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김 산의 침묵의 응시는 결과적으로 나와 공동체를 위한 사회적 발언인 셈이다. 우리사회에 얼마나 많은 묵인(黙認)과 무시(無視)의 세월이 있었던가.

김 산의 폭낭은 제주 공동체의 아름다움과 사랑, 안타까움 모두를 담고 있다. 김 산에게 폭낭은 단지 식물인 나무라는 의미를 넘어서서 제주의 역사와 자연, 인간과 사회적 의미를 내포하는 유기체로서의 생명의 구조물로 인식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