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관념적 서사와 환상의 조화가 자아낸 문화의 풍경
권주희(독립기획자/스튜디오126 대표)
우리는 환상이나 상상을 통해 실존하지 않는 것을 회상하거나 이미지화할 수 있다. 이것은 단순히 생각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부재하거나 현존할 수 없는 개념을 꿈꿀 수 있도록 표상하는 능력이다. 김산의 작품은 실재할 것 같은 제주의 풍경을 배경으로 삼는다. 하지만 이것은 자연을 화폭에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닌 작가의 기억과 상상이 가미된 재현적 풍경이다. 재현은 종종 유사성과 모방에 관한 문제로 이어지며 철학적인 표상주의와 연루되곤 한다. 다시 말해, 특정한 대상은 인지된 외부의 대상과 근본적으로 다른 심상이라는 것이며 인간은 최초의 감각 자체가 아닌 그것의 의미를 심상으로 기억한다는 뜻이다.
전통적으로 미술의 재현을 언급할 때 고려하는 세 가지 요소는 사물, 그것의 실제 이미지, 그리고 심상이다. 그중에서도 일반적으로 ‘이미지’라고 일컫는 ‘심상’은 정신적 산물로서 위상을 지닌다. 이미지란 어떤 사물과 사물의 실제 이미지 사이에 개입된 표상으로 인식되며 대상의 모사이거나 특정 의도가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래서 회화는 정신적인 의미와 동등하게 ‘환상적’, ‘관념적’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김산의 환상적 풍경은 제주에서 비롯된 정체성과 관련된다. ‘정체성’이라는 용어의 현대적인 용례는 구성원이 자신을 자신과 공유된 특성이나 조건, 또는 문화적 기원을 통해서 인식함을 의미한다. 제주도는 지정학적 위치나 지리적 환경뿐만이 아니라 시간의 축을 따라 형성된 역사적 서사 안에서 독특한 섬 문화를 형성해 왔다. 한반도에서도 특수한 지리적인 조건, 주변부로서의 존재, 역사적 사건들과 더불어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것은 설화를 비롯한 ‘이야기’였다. 본토와 다른 특수한 문화를 이루는 과정에서 도출된 이야기 속에는 그들의 사유와 생존 양식이 담겨 있다. 이러한 과정이 축적된 문학적 상상력은 사실을 함축한 중요한 의미이자 더 나은 세상을 주도하는 비판적 대응이기도 했다.
특히, 김산 작가는 제주를 기반으로 한 관념적 풍경에 설화를 녹여내어 지역문화를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작품명인 <본향(本鄕)>은 일반적으로 고향이나 태생지를 뜻한다. 즉,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이 가능한 장소다. 전기적인 관점에서는, 작가의 고향인 제주를 지칭하고, 거시적 의미로는 대자연을 뜻하기도 한다. 본향에는 직접 경험하지는 못했지만 전해져 오는 이야기들, 역사적 사실, 인간과 자연이 형성해 온 다양한 서사가 축적되어 있다. 4.3, 본향당(本鄕堂), 해녀 등 제주를 형성하는 문화적 요소들은 주로 생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 역사적인 사건에서 비롯된 이유를 알 수 없는 죽음, 그로 인한 소중한 이의 부재, 생계의 수단인 바닷일에 대한 우려 등이 반영되어 나타난다.
화면에 홀로 등장하는 백록(白鹿) 또한 작가 자신을 대변하기도 하고 대자연에 속한 인간을 상징하기도 한다. 소중한 존재가 무사하길 바라는 염원, 자신들의 터전인 제주, 더 나아가 자연을 수호하고자 하는 마음은 백록을 통해 함축적으로 드러난다. 백록은 제주 신화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영물로서, 장수를 기원하고 자연을 수호한다는 의미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김산은 회화를 통해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탐구한다.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여기면서도 자연을 재조형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로 인식하여 경계하기도 한다. 자신의 작품을 ‘사회적 풍경’ 혹은 ‘경험적 풍경’이라 일컫는 작가는 인간이 자연에 남기는 인위적인 흔적들을 묘사한다. 이를테면 곶자왈(곶+자왈)에 동물의 뼈, 돌담 아지트, 폭낭, 돌담, 밭, 마을, 들, 본향당, 정거장 등을 장치화하고 새, 사슴, 넝쿨, 숲과 관계를 맺도록 한다. 이 모든 요소가 화면 안에서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지만 실재하지는 않는 풍경으로 제시한다. 극명하게 대비되는 푸르른 숲과 백록, 드넓은 숲에 홀로 서 있는 생명은 비현실적이고 몽환적인 조화를 이룬다. 현재 우리를 둘러싼 자연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환상적인 풍경을 통해 자연을 하나의 독립적 객체로 바라보며 훼손되지 않고 보존되길 바라는 존중의 마음을 담는다.
상상과 현실이 빚어낸 문화적 풍경은 멈춰있는 것이 아니라 순환하고 변화하는 환경에 관한 이야기다. 자연 안에서 인간이 그려내는 흔적은 축적되고 또 다른 줄기로 이어지면서 다양한 관계를 형성한다. 정체성이라는 개념도 마찬가지로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라 무수한 요소가 결합된 변화 안에서 끊임없이 재맥락화, 재의미화되는 것과 같다. 문화란, 자연이 자아내는 풍경 위에 사람이 인위적으로 재구성하고 재편집하여 조화를 이루는 행위이다.
김산의 작품은 제주라는 지역, 그리고 그곳에서 형성된 문화가 명확한 지표로 역할하며 작가의 상상력, 기억력과 같은 탈감각적인 능력이 통합되어 가상의 공간을 형성한다. 이것은 인간이 본향에서 삶의 양식과 태도를 찾아가는 여정이며 관념적 서사와 환상의 조화가 이뤄낸 문화적 풍경이다.
2021
‘사회적 풍경’, 공감과 소통의 메신저
김명훈(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학예연구사)
미시적 시선이 애정에서 비롯되듯, 김 산은 정밀하고 섬세한 시각으로 제주도의 돌 하나, 풀 한 포기, 나뭇잎새 하나하나를 묘사한다. 절제된 색채와 성실한 묘사로 표현한 제주도의 자연은 평범하면서도 생경한 풍경으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러한 익숙함과 이질감의 교차지점에서 우리는 작가의 단순하면서도 진솔한 메시지를 읽을 수 있다.
작품에 등장하는 자연은 제주도의 순수하고 근원적인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작가가 보고 느끼며 몸담아온 제주도의 자연은 “나를 포함한 제주, 제주인의 모든 정체성과 정신세계를 함축하고 있는 곳으로서의 본향(本鄕)(『작가노트2019』)”이다. 즉 제주도의 자연은 물리적인 자연임과 동시에 개인적, 집단적 기억과 경험이 누적된 공간이다. 작가는 끊임없는 관찰과 연구로 공간에 내재한 무의식의 원형들을 선과 색채, 동식물 등의 다양한 소재를 통해 상징의 형태로 이끌어낸다. 이러한 예술적 발상의 과정에서 생성되는 결과물의 경우 객관적 보편성이 부족하면 공감도가 떨어지며 그 반대의 경우 독창성이 낮아지기 마련이다.
작가는 곶자왈, 돌담, 폭낭 등 제주도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들을 사생하고, 극사실적인 표현력을 바탕으로 공간을 재구성하여 독특한 화면을 창출한다. 이를 통해 예술적 발상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위의 두 가지 문제를 적절하게 해결한다. 그 결과 작가가 연출하는 풍경에는 다양한 해석의 층위가 존재하게 되며, 보다 확장된 내러티브를 함축한 새로운 구조가 만들어진다. 이러한 미학적 접근법은 천인합일의 일원론적 세계관에 기반한 동양철학에서 비롯한 것으로서 작가는 그 사고의 범위를 확장하여 예술의 사회적 기능에 대해서 고민한다. “나는 대상을 직접적으로 묘사하는 것을 넘어 개념적이거나 감각적 측면으로, 또는 심리적이면서, 혹은 사회적인 발언의 측면에서 작품을 창작한다.(『작가노트2021』)”
작가가 보여주는 제주도의 자연은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공간이자 독특한 지역성을 유지하고 있는 공간이다. 여기에 기저한 무의식의 원형들은 역사적으로 형성된 문화심리와 사회심리의 추동과 축적에 의한 결과물이다. 작가는 이를 능동적으로 체화한 후 선과 색채로 연역하며 문화적 색채를 보유한 독창적인 ‘사회적 풍경’으로 승화시킨다. 그 결과 ‘사회적 풍경’에 내재한 복합적인 표상들을 마주하는 감상자는 귀납적인 경험을 통해 작가의 사유 과정을 복원하며(혹은 감상자의 이해도에 따라 추체험하며) 보다 원론적인 차원에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게 된다.
“넘치는 문명에 도취된 우리들의 이야기를 화면에서 환기시키는 것은 오늘날 무관심증으로 병들어가는 마음을 치유하는 행위이기도 하다.(『작가노트2021』)” 궁극적으로 ‘사회적 풍경’은 본질적 가치를 담고 있는 자연이자 나와 사회, 과거와 현재를 종횡으로 이어주는 연결고리이다. 작가는 생의 의지를 구현하는 상징적인 공간을 논리적이고 유기적인 방식으로 구축함으로써 외부와의 공감과 소통을 효율적으로 이끌어내고 있는 것이다.
2019
本鄕: 실향과 애도
문성준(작가)
인간은 원하건 원하지 않건, 자신의 시대 속에 있다. 이 말을 부정할 방법은 없다. 화가라면 누구나 시각체계(scopic regime)를 벗어나 보려 안간힘을 쓰지만, 심지어 그 안간힘마저도 시대적이다. 모네가, 세잔이, 그리고 호크니가 그랬던 것처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시각 예술가가 그랬다. 그린다는 행위는 본래 봄(seeing)에 근거한 것이고, 본다는 행위(seeing)는 물질적이고 제도적인 배치에 의해 사회 문화적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사회와 문화, 즉 시대라고 일컬을 수 있는 그 파도에 직면한 작가는 조약돌처럼 휩쓸릴 뿐이다. 그러므로 김산의 작품에 지금의 제주도가 묻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만, 우리가 흔히 보는 제주는 아니다. 그의 눈은 시대착오적인 시각으로 제주의 날것을 핥고, 그것을 가시덤불처럼 삭막하게 그린다. 예술가의 눈이 그렇다. 거리의 돌멩이를 보고도 기원전을 상기하고, 썩은 사과를 보고도 시각적 수사학을 떠올리듯 모든 면에서 비일상적(abnormal)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시대를 잃지 않는 것. 그것이 예술가라면 가지고 있어야 할 리얼리즘적 역량이다.
작가의 제주는 지금 TV 교양 예능 프로그램에 나오는 제주가 아니다. 밝고 고운 톤으로 새로운 유토피아를 말하는 TV 프로그램 속 제주는 이질적인 공간(heterotopia)이다. TV 디스플레이 속 몽타주는 이미지의 한 역할인 이마주(image)의 창조에 충실하였다. 원래 이마주라는 것이 실재와 관념의 단절을 야기하는 것은 아니므로 제주에 대한 이마주들도 어느 부분에서는 진실하겠지만, 어느 부분에서 그러하다는 말은 많은 부분에서는 그렇지 못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리고 헤테로(hetero-)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이형성(異形性)이 필요한 것처럼, 지금의 제주는 끊임없이 이마주를 생산해내고 있다. 마치 서사의 힘을 잃은 영화가 대사에 매달리는 것처럼, 지금의 제주는 섬 자체의 서사보다는 잠깐의 팝업(pop-up)이 대신하고 있다. 하지만 영화의 심오한 질문과 통찰은 서사 전체가 던지는 것이지 주인공의 한두 마디 대사가 던지는 것이 아니다. 제주는 그 힘을 잃어가고 있다.
김산의 역할과 목적은 TV 프로그램과 다르다.
그의 작품에는 날것의 제주가 있다. 돌담 사이로 몰아치는 앙상한 바람과 그 바람에 시달려 억척스러워진 덩굴과 그 틈을 비집고 자라는 덤불 같은 제주가, 그의 그림에는 있다. 숲처럼 우거진 덤불이라는 의미의 곶자왈이라는 이름처럼, 아무런 낭만 없이 거칠고 담백하게 그려진 섬이 바로 그의 제주다.
하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그의 작품은 낭만적이기도 하다. 낭만을 덧대야 할 필요가 없을 만큼 제주는 이미 낭만적인 섬이라고 말하듯, 아무런 은유 없이 묘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낭만적 세계에서의 인간이 세계에 대한 대자적 입장을 포기하고 자연의 일부가 되기를 원하는 것처럼, 김산도 덤불 속으로 들어선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곶자왈을 조망하지 않는다. 작가의 시각은 덤불 숲 안에 머물며 종합으로서의 인간상을 포기한다. 그의 풍경은 언제나 근경(近景)이다.
하지만 가까움은 상처를 동반한다. 낭만이라는 개념을 뒤집어 보면 거기에는 슬픔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기 마련이다. TV 프로그램이 아무리 단편적 이마주들의 향연이지만, 그것도 동시에 실제이고, 그러므로 제주가 변하는 것도 현실이다. 김산의 작품은 그 현실에 대한 애도이다. 그의 전시는 본향(本鄕)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지만, 실향(失鄕)을 말하고 있다. 애당초 제주에서 작업하는 작가가 제주라는 본향을 그린다는 것은 이미 그것의 상실을 감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지척에서 목격하는 작가는 당연히 더 큰 슬픔을 느낄 수밖에 없다.
다행인 점은, 대상의 상실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을 대상과 동일시 하며 자기 파괴적인 무력감에 사로잡히는 우울과 달리, 애도는 대상의 상실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쏟았던 리비도를 회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울에는 기간이 없지만, 애도에는 기간이 있다.
김산의 작업은 그가 고향을 애도하는 기간이다.
그 애도 기간 끝에 완전히 회수된 리비도가 어떤 모습으로 탄생할지 궁금하다. 그것은 실향을 받아들인 새로운 동시대 미술이 될 것이다.
2017
폭낭, 사회적 의미를 담은 유기체 생명의 구조물
전은자(이중섭미술관 큐레이터)
김 산의 그림을 본 첫 느낌은 강렬함이다. 이것은 단지 흑백의 대비에서 오는 색채의 문제뿐만 아니라 작가의 삶에 연유한 어떤 특정한 감정의 발산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세상의 모든 것은 주체를 위해 존재하는데 사실상 주체의 의지는 스스로 자신을 결정하는 하나의 욕망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본 대상의 이미지는 자신의 의지가 탄생시킨 결과물이다. 그런 점에서 한 점의 그림 또한 작가가 발산하는 이성과 감성의 증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김 산의 그림에는 고독감이 배어 있다. 인간은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수많은 관계 속으로 내던져진다. 인간의 관계는 이익과 욕망을 위해서 타협하거나 화해하는 가운데 형성되고 같이 살아가기 위해서 협력하게 된다. 사회적 삶이란 다수의 인간들이 벌이는 생존경쟁 속에 놓이는 삶이다. 따라서 인간인 한 어떤 장소, 어떤 경우든 간에 관계 속에서 소외가 발생한다. 소외감의 원인과 정도가 다를 뿐 소외감이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김 산은 비바람에도 홀로 꿋꿋하게 서있는 폭낭(팽나무)에 자신의 예술의지를 투사하고 있다. 그는 제주도의 폭낭에게 누구보다도 가까이 다가서고 있다. 그것은 폭낭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언술(言術) 행위, 즉 침묵의 커뮤니케이션과 다름이 없다. 김 산에게 폭낭은 그 장소의 역사, 공동체의 삶을 지켜본 할아버지의 눈으로 시간의 흐름을 기록한 침묵의 메모리와도 같은 것이다.
나는 김 산의 ‘침묵’과 ‘응시’에 주목한다. ‘침묵(沈黙)’이란 말없는 것, 또는 말하지 않는 것이다. ‘응시’란 단순히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을 집중하여 똑바로 쳐다보는 것이다. 여기에서 폭낭은 의인화된 김 산 자신이 된다. 그는 무엇을 말없이 집중적으로 쳐다보는가. 변화에 대한 안타까움과 고독감이 배어나는 그의 폭낭 그림들은 역사주의와 환경주의에 맥락이 닿아 있다.
그는 또한 예술 활동을 사회적 책무로 여기고 있다. 예술의 사회적 책무란 공동체의 건강을 위해 노력하는 것, 공공의 가치를 미적으로 실현하는 것이다. 공동체를 위해 예술로써 사회적 발언, 고발, 저항, 기록을 하는 것이다. 김 산의 이런 생각은 바로 인류의 리얼리즘 전통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김 산의 작품이 크게 리얼리즘 전통에 서 있게 된 것은 그의 어린 시절의 성장과정과 무관하지 않다.
한창 암울했던 시절인 19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반에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겪은 어린 김 산의 시대 경험은 흑백 목판화 느낌, 토착적인 아이덴티티, 역동적 현장감, 사회적 참여 등이었다. 이런 경험은 그의 미의식과 정서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김 산의 침묵의 응시는 결과적으로 나와 공동체를 위한 사회적 발언인 셈이다. 우리사회에 얼마나 많은 묵인(黙認)과 무시(無視)의 세월이 있었던가.
김 산의 폭낭은 제주 공동체의 아름다움과 사랑, 안타까움 모두를 담고 있다. 김 산에게 폭낭은 단지 식물인 나무라는 의미를 넘어서서 제주의 역사와 자연, 인간과 사회적 의미를 내포하는 유기체로서의 생명의 구조물로 인식되고 있다.